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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김동진 심판, 200번째 경기도 첫 번째 경기처럼

(TGN 대전) 14년의 프로 심판 생활, 200번째 킥오프 휘슬을 부는 순간 김동진 심판(47)은 자신의 첫 번째 킥오프 휘슬을 떠올렸다.



지난 13일 서울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이랜드FC와 대전하나시티즌의 2020 K리그2 경기. 이 경기는 김동진 심판의 200번째 프로 경기였다. 1997년 심판 생활을 시작한 김동진 심판은 2006년부터 프로 심판으로 활동했고 지난해까지 14년 동안 K리그1, K리그2를 합쳐 주심으로서 197경기를 뛰었다. 올해도 기록은 이어져 지난 13일에 K리그 통산 2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KFA는 이날 경기에 앞서 김동진 심판에게 200경기 출전 기념패를 전달했다. 주심으로서는 역대 여섯 번째 200경기 출전 달성이다. 김동진 심판은 이날 경기에 대해 “K리그 첫 경기 때가 생각나 무척 떨었다”고 설명했다. 매 경기를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경기처럼 생각하고 뛴다는 그의 신념과 맞물린다. 그는 200경기 출전을 달성하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이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다시 다음 경기를 준비한다.


-200경기 출전 기념패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K리그 첫 경기 때가 생각났다. 무척 떨었던 기억이 있다. 200번째 경기라고 하니 그때보다 더 떨리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내 심판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였다. 의미가 큰 만큼 경기에 들어가면서 절대 오심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웃음). 경기가 끝난 뒤에는 내 자신에게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이야기했다.


-축하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연락을 많이 받았다. 특히 심판들로부터 축하를 많이 받았다. 다들 서로 힘든 것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 프로에서는 한 경기, 한 경기가 살얼음판이다. 선수들이 완벽하게 준비해 최고의 기량을 펼치고자 하는 만큼 심판도 절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내 판정 하나에 누군가가 피해를 보면 안 되니까. 내가 실수를 하면 심판 전체가 손가락질을 받으니까. 그 모든 것들을 공감하고 있는 심판들의 축하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후배 심판들이 “300경기도 가시죠”라며 웃는데 그건 힘들 것 같다고 했다(웃음).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그럼에도 200경기나 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언제나 마지막 경기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다음 경기는 없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들어간다. 자꾸 다음을 생각하면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 잡념이 생기고 마음을 놓아버리면 실수가 발생한다. 또한 지난 경기나 상황을 자꾸 생각하는 것도 집중을 방해한다. 실수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는 잊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한 경기, 한 경기 해온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200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슈퍼매치는 늘 기억에 남는다. 워낙 주목을 많이 받는 경기라 심판의 판정 하나, 하나도 관심을 받는다.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심판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호를 외친다. 다들 알지 않나(웃음). 신인 때는 공과 선수만 보였는데, 어느 정도 경험과 여유가 생긴 뒤로는 벤치의 움직임, 관중들의 목소리, 얼굴이 다 들리고 보이더라. 그 구호를 못 듣는 심판은 없을 거다(웃음). 심판의 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는 것도 경기의 일부고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정도만 잘 지키면 된다.


지난해에도 수원삼성과 FC서울의 경기(2019/05/05)에 들어갔다. 홍철 선수의 반칙(수원 수비수 홍철이 서울 공격수 박동진의 중심부 급소를 움켜잡은 것)으로 논란이 됐던 그 경기다. 심판 생활을 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기억에 남는다. 교육 자료에서나 보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보니 중계화면에 내가 VAR 온-필드 리뷰를 하면서 황당하게 웃는 장면도 잡혔더라(웃음).


-국제 심판으로 참가한 대회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는가.


2011년에 FIFA U-20 월드컵과 아시안컵에 참가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시안컵의 경우 당시 중동 지역이 정치적인 이슈가 많을 때라 상당히 곤욕스러웠다. 이란의 아자디스타디움에서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관장했던 것도 잊지 못한다. 10만 관중의 함성 속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까 의문이었는데, 그래도 들리긴 들리더라.


-심판이라는 직업의 매력은 무엇인가.


물론 쉽지 않다. 시작할 때는 이렇게 힘든 직업인지 몰랐다. 그래도 보람이 크다. 경기를 끝까지 잘 마무리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나 페널티킥 같은 어렵고 중요한 판정을 잘해냈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선수들과 함께 땀 흘리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이 생긴다. 국제 경기를 다 합하면 350경기 정도 뛰었다. 이제 연골이 다 삭은 것 같다(웃음). 그래도 재미있다. 선수들에게 인정받고 지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동료 심판들과 서로 도우며 성장하는 것, 모두 큰 보람이다.


-교수라는 직업도 함께 하고 있는데.


지난해 10월부터 안동과학대 축구과에서 전임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운 좋게 기회가 와서 잘 잡았다. 두 직업을 함께 하다 보니 사실 쉴 시간은 없다.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고 있다. 국제심판으로 활동하면서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보니 가족들도 익숙한 것 같다(웃음). 가족사진을 보면 늘 아내와 딸, 아들 셋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면 조금 슬프다. 한 번은 딸이 초등학교 수업 준비물로 가족사진을 가져가야했는데,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서 아빠는 사진을 찍어준 걸로 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가족의 응원 덕분에 바쁜 생활도 이어갈 수 있다. 심판 육성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고 있다. 교수로 학생들을 잘 지도해 좋은 심판을 양성하고 월드컵 심판, 프로 심판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심판에 대한 열정을 가진 좋은 인재들을 잘 성장시키면 한국축구의 튼튼한 기둥이 되지 않겠나. 세계적인 선수도 어려서부터 좋은 지도가 뒷받침돼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판 역시 좋은 육성 시스템을 갖춰나가야 한다. 우리 학교에서는 심판 자격증 코스를 만들어 운영 예정이다. 하반기부터 50명 이상이 3급 심판 자격증을 준비한다. 향후에는 심판과를 개설해 보다 집중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싶다.


-심판 은퇴시기를 고려하고 있나.


체력테스트가 부담되는 시기가 곧 올 것이라 생각한다. 몸이 조금씩 쉬라고 신호를 보낸다. 스스로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 오래 하지 못할 것이다. 즐기면서 해야 하는 일인데, 경쟁하듯 하다보면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제는 몸 생각을 해야 할 나이다(웃음). 은퇴를 결정하고 마지막 경기를 하게 되면 울 것 같다. 호루라기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아쉬운가.


1997년에 시작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오래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말이다. 200경기를 공식적으로 기념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KFA에 감사하다. 기념 플래카드에 홍명보 전무님도 사인을 해주셨더라. 길이길이 가보로 남길 것이다(웃음). 코로나19로 인해 조용한 전달식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후배들이 심판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길 바란다.


[뉴스출처 :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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